전남/보성::송재 서재필 선생 생가 방문
목임당 바로 뒤편에는 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 선생 생가가 있습니다. 목임당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되어, 송재 서재필 선생 생가에 먼저 방문을 하였습니다.
서재필 선생께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의 정문입니다. 왼쪽에 살짝 목임당의 지붕이 보입니다.
정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당에서는 목임당의 지붕이 빼꼼 보이고요. 정문을 통과하고 처음 마주하는 건물의 이름은 가은당입니다. 아래 생가 설명에 따르면 가은당은 학당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생활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가에 대해 소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개혁가, 언론인, 의료인으로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송재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이곳에서 부친 달성서씨 광언 공과 모친 성주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는 행낭 터에서 자식을 낳아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일념으로 4남 1녀를 이곳 친정에서 낳았는데 선생이 태어나던 날 부친이 과거에 급제하니 경사가 겹쳤다 하여 어려서는 선생의 이름을 쌍경이라 불렀다.
7살까지 성장하여 기초학문을 닦았던 이곳은 선생의 외증조부 이유원 공이 터를 잡았으며, 외조부 이기대 공은 3천여 권의 장서를 구비하고 가은당, 일감현, 천상재의 3학당을 운영하였는데 유명한 학자들이 왕래하며 학문을 논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기대, 이지용, 이교문, 이일 공의 장자로 이어진 연 4대 문집이 있어 "가천세고"라는 책명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선생의 외종형인 이교문, 조카 이일 공은 부자간에 호남창의소 의진에 가담하여 군량을 조달하는 등 구국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6·25 전쟁 때 60여 호의 마을이 모두 소각되면서 선생이 출생하고 자랐던 생가도 소실되었으나 2003년 중요한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서재필의 외가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서재필 (1864~1951)은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정변이 3년 만에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귀국하여 이듬해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여 민권 신장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되자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동포들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1925년 범태평양회의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서재필이 태어난 집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2003년 복원하여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아름다운 가은당 곳곳을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관리하시는 분은 보이지 않았고 대문도 활짝 열려있었지만, 그럼에도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습니다.
얼마 전에 눈이 왔었는지 응달에는 눈이 조금 쌓여있었습니다. 사람의 흔적은 없고 귀여운 고양이 발자국만 찍혀 있었어요.
가은당을 지나면 건물이 2채가 있습니다. 사진에서 정면에 보이는 한옥이 서재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한옥이 생가라고 합니다.
생가 뒤편에는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항아리는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장을 보관하는 것 같았어요. 아마 마을에 사시는 누군가 놓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가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당이 있습니다. 초당은 매우 안쪽에 있는데 결혼 전의 딸들이 기거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이 초당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초당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서재필 선생 모친께서 초당 옆 뽕나무를 휘감으면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이를 태몽이라 직감하고, 부군을 오시도록 하여 선생을 잉태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제가 왜 그랬는지 설명만 열심히 읽고 초당 사진도 남기지 않고 나왔네요.
위키백과에 쓰인 서재필 선생에 관한 내용을 짧게 요약해 보았습니다.
서재필 선생은 벼슬에 오르면서 김옥균, 박영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되고 세계 흐름과 신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서양 문물을 읽으며 시국을 논했으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살펴보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개화당 인사들과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친인척은 몰살당하고, 친구들도 투옥 및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서재필 선생도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일본에서 1년간 지내다가, 일본 정부에서도 갑신정변에 대한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개화파 인사들을 박대하게 되면서 서재필 선생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간 후에도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긴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의사가 되었고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한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종 차별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고, 그래도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미국인 고문의 자격으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부정적이었고 아직 적개심과 혐오감도 품고 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의 개화 계몽 운동에 앞장섰고 개화도 일본의 도움 없이 자주적으로 하길 바랐습니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 건립을 위해 한국 최초의 모금 캠페인을 벌이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단체를 조직하고, 범태평양회의,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며 조선의 독립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사업을 잘 돌보지 못해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서재필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든 생각은 조선에 대한 애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재필 선생은 차갑고 냉소적인 면도 있지만,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경험하였기에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사랑했으며 계몽 및 독립운동을 자주적으로 이루어가길 원했습니다.
서재필 선생의 생가에서 나와 가볍게 동네 산책도 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만났다면 정말 예뻤을 것 같은 돌담길이에요. 겨울이라 조금은 쓸쓸한 풍경입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돌담의 기와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날이 풀리면 돌담도 초록잎이 덮을 듯합니다. 그래도 돌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겨울도 좋네요. 자연의 흙과 돌로 만들어진 이런 돌담은 쉽게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작고 아담한 동네라 돌담길은 짧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언젠가 따뜻한 날에 찾아와서 좀 더 멀리까지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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